책 소개
제각각 낯설고 먼 영토와 같은 사람들, 그 사이를 이어주는 여섯 개의 지도.
타인이라는 영토에 무사히 닿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약속과 다짐이 필요할까? 질문의 답을 찾아 써 내려간 『지도와 영토』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여섯 개의 여정을 담은 소설집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마주침을 계기로 서로 다른 경험과 감정, 상상과 의지를 가진 인물이 어떻게 연결되고 영향을 미치며 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심경의 변화」는 대학 동창 모임에서 만난 선배 정원이 최근에 닥친 변화에 대한 고민을 후배인 ‘나’에게 털어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픈 유어 마인드」는 과거의 기억으로 마음을 닫아버린 지완과 그 마음이 궁금한 윤형의 동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치 길고양이 같은 지완과 그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는 윤형의 관계가 눈처럼 차가우면서도 포근하게 이어진다. 「잠은 부드러워」는 어린이집에서 일하며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세연이 고등학교 단짝인 승임과 통화하면서 잊었던 감각과 기억을 복원해 나가는 이야기다. 「우아한 유령」은 은퇴를 결심한 미술 작가 을영과 기자인 ‘나’의 이야기를, 「북토크」는 부산의 한 서점에서 열리는 북토크에 가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동행하는 작가 정원과 편집자 재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에 수록한 「많이 보고 싶음」은 여학생만 있는 고등학교 천체관측부에 한 남학생이 들어오면서 생긴 작은 파문을 담고 있다. 앞서 소개한 단편이 모두 여성 화자가 여성 인물과 교감하며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라면, 「많이 보고 싶음」의 여성 화자는 교감하는 두 남성의 친밀한 관찰자로서 한편으로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차례
들어가는 문 / 5
심경의 변화 / 17
오픈 유어 마인드 / 39
잠은 부드러워 / 95
우아한 유령 / 145
북토크 / 173
많이 보고 싶음 / 217
책 속에서
첫 문장
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문을 잘 여는 사람이었습니다.
P. 9 한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한 나라에 입국하는 것만큼 적정한 절차와 규칙, 그리고 이동 수단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이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돌며 머물 곳을 찾는 마음은 난민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요. 또래를 보면 재고 따지는 것 없이 일단 같이 뛰어노는 어린아이나, 동족만 봐도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 개와 강아지 앞에서 참으로 쑥스러운 인간 어른의 현실이지만 두려운 만큼 용기 낼 수 있는 종도 바로 인간, 어른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 「들어가는 문」 중에서
P. 82 윤형은 지완을 처음 볼 때부터 길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따뜻하고 정이 많은 동네를 산책할 때면 종종 마주치곤 하는, 자기만의 법칙에 따라 인간 사이를 별처럼 거니는 작은 고양이. 그런 고양이가 안식처를 찾아 제 발로 윤형의 집에 걸어들어온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혼자서만 다른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 같은 지완에게 윤형은 마음이 쓰였지만 지완이 거리를 두는 만큼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 했다. 낯설고 외롭고 조용한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나면 여기도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이사 온 날, 떨어진 CD를 하나하나 주워 담는 지완의 등을 볼 때부터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 - 「오픈 유어 마인드」 중에서
P. 128 “후각이 사라진 게 아니라 내가 후각을 사용하지 않는 거래.”
“그럴 수도 있나?”
“감각이라는 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데 몸이 그것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그 감각이 자기 역할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사라진다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
“내가 안 써서 사라진다는데 그럼 써 줘야지. 아직 필요하다는 걸 알려줘야지. 집에 와서 손수건에다 예전에 좋아했던 향수를 뿌린 다음에 코에 대고 있는 힘껏 들이마셨어. 처음엔 아무 냄새도 안 났지만 그래도 계속 숨을 들이쉬었어. 코뿐만 아니라 온몸을 다 사용해서. 정수리부터 심장, 위장, 대장을 거쳐 골반, 무릎, 발가락까지, 내 몸 전체가 하나의 호흡 기관이라는 생각으로 들이마셨지. 그러니까......”
“후각이 돌아왔어?”
“돌아왔어.” - 「잠은 부드러워」 중에서
P. 155 그때까지 담담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던 을영은 이 대목에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말을 아끼는 건지, 고르는 건지, 정말 할 말이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 머뭇거린 끝에 들려준 말이라곤 「글쎄요......」뿐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인터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답의 순간이 어쩌면 바로 그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터뷰의 핵심에 닿는 순간은 인터뷰이가 늘 하던 대답을 기계처럼 조리 있게 말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가 아니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주춤하면서도 진실에 가까운 대답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때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 「우아한 유령」 중에서
P. 213 열여덟 기의 무덤을 다 돌고 처음 자리로 돌아왔을 때 재영은 이 산속 고분군이 너무 작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한 바퀴 더 돌기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제 서점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북토크」 중에서
P. 218 천체관측부에 처음으로 남자애가 들어온다고 했을 때 그 조용한 동아리방 안에서도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지. 그전까지 천체관측부에는 여자들뿐이었거든. 언제부턴가 천체관측부는 여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는 둥, 이름만 천체관측부지 비공식적인 레즈비언 동아리라는 둥 하는 얘기들이 돌았지만 그런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동아리방에 아무도 없었어. 한두 명씩, 많아야 서너 명이 번갈아 동아리방을 찾아와 조용히 책만 읽고 영화만 보는 사람들이야. 우린 다른 동아리처럼 신입생 반을 돌아다니면서 동아리를 홍보한 적도 없고, 전교에 여덟 명뿐인 회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과묵한 데다가, 어딘가에서는 레즈비언 동아리라는 소문까지 나고 있었는데 넌 대체 어떤 마음으로 여기 왔을까. 나는 그게 참 궁금했어. - 「많이 보고 싶음」 중에서
저자 소개
강민선
계속 쓰는 사람.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듯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2017년에 독립출판물 『백쪽』을 시작으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2018), 『월요일 휴무』(2018), 『시간의 주름』(2018), 『여름특집』(2018), 『가을특집』(2018), 『나의 비정규 노동담』(2019), 『비행기 모드』(2019), 『외로운 재능』(2019), 『우연의 소설』(2020), 『자책왕』(2020), 『겨울특집』(2020), 『극장칸』(2021), 『하는 사람의 관점』(2022), 『비생산 소설』(2023) 등을 쓰고 만들었다. 저자로 참여한 책은 『상호대차』(이후진프레스, 2019), 『도서관의 말들』(유유, 2019), 『아득한 밤에』(유어마인드, 2021), 『끈기의 말들』(유유, 2023)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책 소개
제각각 낯설고 먼 영토와 같은 사람들, 그 사이를 이어주는 여섯 개의 지도.
타인이라는 영토에 무사히 닿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약속과 다짐이 필요할까? 질문의 답을 찾아 써 내려간 『지도와 영토』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여섯 개의 여정을 담은 소설집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마주침을 계기로 서로 다른 경험과 감정, 상상과 의지를 가진 인물이 어떻게 연결되고 영향을 미치며 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심경의 변화」는 대학 동창 모임에서 만난 선배 정원이 최근에 닥친 변화에 대한 고민을 후배인 ‘나’에게 털어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픈 유어 마인드」는 과거의 기억으로 마음을 닫아버린 지완과 그 마음이 궁금한 윤형의 동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치 길고양이 같은 지완과 그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는 윤형의 관계가 눈처럼 차가우면서도 포근하게 이어진다. 「잠은 부드러워」는 어린이집에서 일하며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세연이 고등학교 단짝인 승임과 통화하면서 잊었던 감각과 기억을 복원해 나가는 이야기다. 「우아한 유령」은 은퇴를 결심한 미술 작가 을영과 기자인 ‘나’의 이야기를, 「북토크」는 부산의 한 서점에서 열리는 북토크에 가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동행하는 작가 정원과 편집자 재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에 수록한 「많이 보고 싶음」은 여학생만 있는 고등학교 천체관측부에 한 남학생이 들어오면서 생긴 작은 파문을 담고 있다. 앞서 소개한 단편이 모두 여성 화자가 여성 인물과 교감하며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라면, 「많이 보고 싶음」의 여성 화자는 교감하는 두 남성의 친밀한 관찰자로서 한편으로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차례
들어가는 문 / 5
심경의 변화 / 17
오픈 유어 마인드 / 39
잠은 부드러워 / 95
우아한 유령 / 145
북토크 / 173
많이 보고 싶음 / 217
책 속에서
첫 문장
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문을 잘 여는 사람이었습니다.
P. 9 한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한 나라에 입국하는 것만큼 적정한 절차와 규칙, 그리고 이동 수단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이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돌며 머물 곳을 찾는 마음은 난민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요. 또래를 보면 재고 따지는 것 없이 일단 같이 뛰어노는 어린아이나, 동족만 봐도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 개와 강아지 앞에서 참으로 쑥스러운 인간 어른의 현실이지만 두려운 만큼 용기 낼 수 있는 종도 바로 인간, 어른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 「들어가는 문」 중에서
P. 82 윤형은 지완을 처음 볼 때부터 길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따뜻하고 정이 많은 동네를 산책할 때면 종종 마주치곤 하는, 자기만의 법칙에 따라 인간 사이를 별처럼 거니는 작은 고양이. 그런 고양이가 안식처를 찾아 제 발로 윤형의 집에 걸어들어온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혼자서만 다른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 같은 지완에게 윤형은 마음이 쓰였지만 지완이 거리를 두는 만큼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 했다. 낯설고 외롭고 조용한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나면 여기도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이사 온 날, 떨어진 CD를 하나하나 주워 담는 지완의 등을 볼 때부터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 - 「오픈 유어 마인드」 중에서
P. 128 “후각이 사라진 게 아니라 내가 후각을 사용하지 않는 거래.”
“그럴 수도 있나?”
“감각이라는 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데 몸이 그것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그 감각이 자기 역할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사라진다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
“내가 안 써서 사라진다는데 그럼 써 줘야지. 아직 필요하다는 걸 알려줘야지. 집에 와서 손수건에다 예전에 좋아했던 향수를 뿌린 다음에 코에 대고 있는 힘껏 들이마셨어. 처음엔 아무 냄새도 안 났지만 그래도 계속 숨을 들이쉬었어. 코뿐만 아니라 온몸을 다 사용해서. 정수리부터 심장, 위장, 대장을 거쳐 골반, 무릎, 발가락까지, 내 몸 전체가 하나의 호흡 기관이라는 생각으로 들이마셨지. 그러니까......”
“후각이 돌아왔어?”
“돌아왔어.” - 「잠은 부드러워」 중에서
P. 155 그때까지 담담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던 을영은 이 대목에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말을 아끼는 건지, 고르는 건지, 정말 할 말이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 머뭇거린 끝에 들려준 말이라곤 「글쎄요......」뿐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인터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답의 순간이 어쩌면 바로 그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터뷰의 핵심에 닿는 순간은 인터뷰이가 늘 하던 대답을 기계처럼 조리 있게 말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가 아니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주춤하면서도 진실에 가까운 대답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때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 「우아한 유령」 중에서
P. 213 열여덟 기의 무덤을 다 돌고 처음 자리로 돌아왔을 때 재영은 이 산속 고분군이 너무 작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한 바퀴 더 돌기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제 서점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북토크」 중에서
P. 218 천체관측부에 처음으로 남자애가 들어온다고 했을 때 그 조용한 동아리방 안에서도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지. 그전까지 천체관측부에는 여자들뿐이었거든. 언제부턴가 천체관측부는 여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는 둥, 이름만 천체관측부지 비공식적인 레즈비언 동아리라는 둥 하는 얘기들이 돌았지만 그런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동아리방에 아무도 없었어. 한두 명씩, 많아야 서너 명이 번갈아 동아리방을 찾아와 조용히 책만 읽고 영화만 보는 사람들이야. 우린 다른 동아리처럼 신입생 반을 돌아다니면서 동아리를 홍보한 적도 없고, 전교에 여덟 명뿐인 회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과묵한 데다가, 어딘가에서는 레즈비언 동아리라는 소문까지 나고 있었는데 넌 대체 어떤 마음으로 여기 왔을까. 나는 그게 참 궁금했어. - 「많이 보고 싶음」 중에서
저자 소개
강민선
계속 쓰는 사람.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듯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2017년에 독립출판물 『백쪽』을 시작으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2018), 『월요일 휴무』(2018), 『시간의 주름』(2018), 『여름특집』(2018), 『가을특집』(2018), 『나의 비정규 노동담』(2019), 『비행기 모드』(2019), 『외로운 재능』(2019), 『우연의 소설』(2020), 『자책왕』(2020), 『겨울특집』(2020), 『극장칸』(2021), 『하는 사람의 관점』(2022), 『비생산 소설』(2023) 등을 쓰고 만들었다. 저자로 참여한 책은 『상호대차』(이후진프레스, 2019), 『도서관의 말들』(유유, 2019), 『아득한 밤에』(유어마인드, 2021), 『끈기의 말들』(유유, 2023)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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